제목 윤일상의 가요 Talk 10 #6 '영턱스 클럽'편
DATE : 2015.07.23


원본 컬럼 링크: http://ch.yes24.com/Article/View/28179

 

뽕댄스의 창시, 영턱스 클럽 




6편 영턱스 클럽



'나만이 할 수 있는, 한국인만이 만들 수 있는 음악을 만들자.' 그것이 그 시절 나의 모토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어린시절부터 듣고 자라온, 어른들이 언제나 흥에 겨워 부르시던 음악, 우리의 전통가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냥 전통가요를 하는것은
전문 트로트 작곡가분들의 몫이니 나는 섞어야 한다. 전통가요의 색채에 현재의 트렌디한 리듬과 편곡기법을 믹스 시키자.







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만들자


 


1992년 내가 가요계에 데뷔했을
당시 음악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초반에는 팝음악 성향을 따랐고 어떻게 하면 팝처럼 만들까를 고민했다. 수많은 날들과 긴 시간을
팝음악 같은 톤을 연구하고 코드진행을 공부하는 데 보냈다. 이런 일들은 음악을 해 나가면서 꾸준히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일이기도 하고 최근까지도
새로운 편곡기법과 코드진행 등의 학습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현 시대의 흐름을 읽고 기본을 잃지 않기 위해서지 흉내내거나 따라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학습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에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


 


영턱스.jpg 


ⓒ 윤일상홈페이지(http://www.ilsang.com/)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음악을
시작할때 경쟁자가 있었다. 데뷔 당시 크리스 크로스(Kriss Cross)라는 나이 어린 아이들로 구성된 힙합그룹이 인기였는데, 그 그룹을
프로듀싱하고 후에 수많은 아티스트들과 작업을 해온 저메인 듀프리(Jermain Dupri)가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나의 경쟁자는 바로 저메인
듀프리였다. 


 


나름의 이유로는 데뷔 시기가
비슷하기도 했고 나이가 나랑 같아서였는데, 내가 데뷔할 때만 해도 가요계에 데뷔한 10대의 전문 작곡가는 나 하나뿐이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레 그 프로듀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는 미국에서의 그의 행적만큼 나도 한국에서 커리어를 쌓으리라 다짐했다. 언젠가는
빌보드를 정복하겠다는 꿈을 갖게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렇게 그의 음악에 자극도 받으면서 열심히 하루하루 공부해가며 활동에 매진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비디오 한편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한 흑인 어린이가 나와서 춤을 기가 막히게 추며 그루브를 타는 장면이 나왔다. 넋 놓고
그 영상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시작점이
다르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블루스나 알엔비 그리고
힙합을 접하고 팝음악이 자신도 모르게 생활의 일부로 녹아 동화되어 있는 그들과 나의 인생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따라하면
안된다.'


 


팝을 그저 따라만 가다가는 결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내 꿈인 빌보드의 정상을 밟는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만이 할 수 있는, 한국인만이 만들 수 있는 음악을 만들자.'


 


그것이 그 시절 나의 모토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어린시절부터 듣고 자라온, 어른들이 언제나 흥에 겨워 부르시던 음악, 우리의 전통가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통가요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리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음악 곳곳에 알게 모르게 국악기를 삽입하게 된 시기도 그때부터였다.) 그냥
전통가요를 하는 것은 전문 트로트 작곡가분들의 몫이니 나는 섞어야 했다. 전통가요의 색채에 현재의 트렌디한 리듬과 편곡기법을 믹스 시키자.
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만들자. 그렇게 해서 처음 나온 곡이 바로 '정'이다.


 


 



 


'정'이라는 곡을 처음 만들고 난
정말 들떴다.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세상에 얼른 내 보이고 싶어서 흥분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곡 섭외가 들어 온 작업에 언제나
일순위로 '정'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퇴짜였다. 어린 신인 작곡가가 생전 처음듣는 음악스타일을 들고와서 자신만만해 하는
모습을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왜 이 두 장르가 만나야하는건가'라는 질문까지 하면서 '음악이 이상하다'라고까지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곡과 가수는 사람과의 만남 이상으로 '인연'이 중요한데 그래서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의 이주노
형님이 새로운 신인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철 형님이 다리를 놨고 나와 영턱스 클럽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전 처음 듣는 형식의
곡은 멤버들에게도 생소했을 것이며 그들 역시 확신을 갖기 힘들었을 테다. 하지만 꾸준한 믿음을 준 사람이 주노형님과
철이형이었다.


 


"이건 무조건
될거야~!"


 


천만금보다 귀한 그들의 '믿음'이라는
지원덕에 난 더욱 자유롭게 편곡작업과 마무리 작업에 빠질 수 있었고 드디어 '정'이 세상에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새로운
음악의 발표. 결과는 시쳇말로 초 대박이었다. 언론은 앞다투어 기사를 냈고 이 곡은 당시 10대 위주의 댄스음악 시장에서 아저씨나 아줌마를
비롯한 중장년층에게까지 폭 넓게 인기를 얻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음악의 장르를 누군가가 "뽕댄스(혹은
트롯댄스)"라고 칭했고 나는 "뽕댄스의 창시자"가 된다. "뽕댄스의 창시자"로 여러 번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고 그렇게 세상에 나간 뽕댄스는
수없이 많은 아류작을 만들어 냈다. 너도나도 이것에 영향을 받아 음악을 만들어내었고 시장에는 비슷한 류의 음악들이 쏟아졌다. 마치 락앤롤이 붐을
일으켰을 때 너도나도 락앤롤음악을 만들어서 발표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사실 90년대 댄스 전반에 이
코드의 음악이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내가 만든 이 음악장르 때문에 내 스스로 자괴감이 들어 슬럼프가 오기도 했다. 반복되는 비슷한 스타일의
재생산, 즉 자기복제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는데 그래서 이 형식의 음악은 2000년 이후 거의 10년이상 손대지 않다가 최근 김연자 선배님의
"아모르파티", 그리고 최근 발표된 조정민의 "살랑살랑"등에서 나름 심혈을 기울여 한층 업그레이드 된 뽕댄스 작업을 시도해 나가고
있다.)

 
쏟아지던 비슷한 장르의 음악 홍수 속에서도 영턱스클럽은 언제나 중심에 있었다. 그 장르를 최초로 세상에
알린 그룹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 역시 영턱스클럽에 대한 애정이 남 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신인을 처음 만들어서 내 음악으로 색채를 입혀
나가는 것은 정말 흥분되고 기분 좋은 일이다. 더구나 그 팀이나 가수가 성공을 성취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행보를 걸어가면 더 힘이 나는
것도 물론 인지상정이다. 영턱스 클럽은 음악뿐 만 아니라 독특한 안무로도 수많은 이슈를 낳았는데 그것은 제작자인 이주노형님의 안무 메이킹 능력이
영향을 미친것이 분명할 것이다. 앞다투어 여러 연예인들이 '정'의 안무를 따라하였고 길거리에는 언제 어디서나 '정'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임성은, 송진아, 한현남, 지준구, 최승민으로 구성된 1집의 영턱스 클럽 1기 멤버는 화려하게 데뷔했다. 승승장구하는 영턱스 클럽의 기세에
탄력을 받아 다음 앨범작업에 들어가지마자 '타인'이라는 곡이 나오게 된다.


 


 


타인


 


데뷔작 '정'은 빠른 비트의 곡이었기
때문에 2집에는 미디움힙합풍의 비트에 전통가요느낌을 섞고 싶었다. 멜로디 작업이 끝나고 당시는 잘 없었던 후크송형식의 힙합곡을
만들었다.







 
 

 


"한번만 안아주세요, 마지막
밤이잖아요. 이렇게 헝클어놓은 내맘을 달래주세요. 한번만 안아주세요, 마지막 부탁이예요. 이렇게 그대 그냥 가버리시면 다신 볼 수
없잖아요."


 


당시 콤비로 활동하던 이승호 형님의
전통가요 느낌이 나는 이 가사는 나의 곡과 그야말로 딱 맞아떨어졌다. 결과 역시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2집에서 아쉬운 점이 하나 있는데
'정'이라는 곡의 중요한 보컬리스트 역할을 했던 임성은씨가 2집에서는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빠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타인'은 심지어 임성은씨의
보컬을 염두하고서 곡을 쓰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임성은씨 버전의 '타인'을 한번 리메이크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다행히도 새로 바뀐 멤버들과 나머지
멤버들
이 열심히 소화해준 덕분에 '타인'은 '정'과 함께 오랫동안 노래방에서
불리어지는 스테디셀러 중에 하나로 남게 되었다. 물론 타이틀곡이었던 '질투'도 당시에는 큰 인기를 얻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도 오래 기억되는 곡은
'타인'이다. '질투', '타인', 'Love Designer'로 참여한 2집에서는 임성은이 빠지고 박성현이 새로 투입된 2기 멤버로 활동하게
된다. 4집에는 '아시나요'라는 곡으로 3기 멤버 송진아, 한현남, 전현정, 김덕현, 남현준과 함께하였는데, 이 곡 역시 공전의 히트를 하며
영턱스클럽은 승승장구하게 된다. 5집은 4기 멤버 송진아, 한현남, 전현정 등 여성 멤버로 재정비되었다. 나는 '슬픈연인', '재회', '작은
연인' 이라는 곡으로 참여하였고 여기까지가 나와 영턱스클럽의 마지막 인연이었다. 이후 영턱스클럽은 여러 장의 앨범을 발표하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계속 멤버가 교체되다가 어느 순간 더이상 활동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당시
영턱스클럽 멤버들에게 지나치게 엄하게 디렉팅을 했던 것이 참 후회가 된다. 당시에는 요즘 같은 편집장비나 기술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보컬을
한번 녹음하면 수정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더욱 더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데, 당시에는 필요하다 느껴서 그랬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조금 지나치게
채찍질을 가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과 후회가 많이
남아서일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가장 보고 싶은 친구들이 영턱
스클럽 멤버들이다.
언제한번 둘러 앉아 소주한잔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워보고 싶은데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길을 걸어가고 있는 멤버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만남이었겠지만 최근 가요무대와 토토가 공연을 통해 다시 멤버들이 뭉친 것을 보니 정말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뭐라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생겼는데 무한도전의 토토가 기획이 성공하게 된 요인도 이런 감성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언제나 그렇듯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바뀌어도 음악은 영원히 그 사이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음악에 미쳐 음악만 알던 20대
청년에서 40대 두 아이의 아빠가 되니 이제서야 음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구나... 라고 느끼게 된다.


 


영턱스 클럽은 사람냄새 나는 팀이었고
나는 그런 그들의 울림이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게 되는 힘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