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윤일상의 가요 Talk10 #7 브라운 아이드 걸스 1편
DATE : 2015.07.23

원본 컬럼 링크: http://ch.yes24.com/Article/View/28511



소울그룹에서 걸그룹으로, 브라운 아이드 걸스 

 


7편 브라운 아이드 걸스 - 제 1편



반복되는 우연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철이가 프로듀서를 맡은 'L.O.V.E'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아브라카다브라’라는 곡은 브라운다이드걸스 존재감의 정점을 찍게 되었다. 소위 ‘걸그룹’에 속하게 되며 브라운 아이드걸스의 방향성이 그야말로
변화하기 힘들만큼 깊이 새겨진 계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내가 네트워크


 


2000년대에 들어서 나는 해외
아티스트들과의 교류 횟수가 늘어갔고 이에 따라 해외 녹음도 잦아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따금씩 커뮤니케이션에 불편함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메일이나 통화로 나와 상대편 아티스들과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후 그 이상의 일을 할 때면 업무적인 부분을 돕는 주변인물이 내게는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티스트를 마케팅 해주는 A&R이라던지 업무적인 부분을 총괄해주는 담당자가 전무했었고 나는 언제나 직접 전화를
받고, 행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직접 실무자들과 미팅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상대하는 아티스트들에게는 음악 이외의 일을 해주는 전문가가 언제나
존재했었고 내 주위에 업무적인 부분을 돕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상당히 의아해 했다.


 


그래서 나는 '아티스트는 음악적인
이야기만 하고 비지니스는 비지니스 전문가들이 하는 회사를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회사의 중심은 당연히 아티스트여야 하고 비지니스맨은
철저하게 아티스트 케어를 위해 혼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나는 나를 비롯해 회사의 실질적인
얼굴이 될만한 작품자들을 물색했고 뜻에 맞는 사람들을 한두 명씩 영입해 나갔다. 무엇보다 회사의 프론트맨이 될 비지니스 파트의 대표도 있어야
했기에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당시, 테헤란로를 거점으로 벤쳐창업이 붐이었고 이 친구도 그 중 선봉에 서있는 회사에서
촉망받는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룰과 조건을 조율하고 얼마 되지 않는 내 쌈짓돈으로 회사를 창업하기에 이르렀다.


 


회사 이름은 내 자신 스스로가
네트워크가 된다는 의미의 "내가 네트워크"로 지었다. 영문 스펠링을 Nega Network로 쓰다보니 '네가'로 쓰고 읽는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많은데 '엔터테인먼트 컨텐츠 비지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개개인의 아티스트 본인이다'라는, 나름 숙고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렇게 만든 회사에 작곡가, 작사가,
편곡가, 프로듀서들을 영입했고 만들어 갈 가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크고 작은 오디션을 열었다. 내가 있던 건물의 3층에 녹음실과 작업실,
그리고 한켠에 사무실이 있었고 4층은 내가 묵는 집, 그리고 5층이 연습생들의 연습실이 되었다. 가장 초창기 때 모였던 멤버 중에 현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제아, 그리고 써니힐의 승아와 주비가 있었다. 


 


005__BEG02.jpg
출처: 윤일상홈페이지(http://www.ilsang.com/)


 


 


브라운 아이드걸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처음 팀 이름은
'크레센도'였다. 점점 음악성이 상승하는 오래가는 팀이 되었으면 했던 나의 의지로 만들어진 이름이지만 왠지 팀 이름으로 하기에는 아쉽다는 의견이
많아서 언젠가는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크레센도' 시절 제아를 비롯한 나머지 3명의 멤버가 있었는데 '브라운아이드걸스'로 이름을
바꾸기 직전, 제아 외에 모든 멤버들이 팀을 나가게 되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연습생 시절이 너무 길었다는 이유가 가장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오디션과 소개를 통해 가인과
나르샤가 들어오게 되었고 랩이 있는 R&B/Soul그룹을 만들고 싶었던 나의 의지(당시 Soulhead라는 일본팀이 있었는데 그 팀의
컨셉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그런 팀을 만들고 싶었다)로 허니패밀리에서 실력을 다지고 있던 미료를 영입해 바야흐로 전체 멤버구성이
결정되어졌다.


 


'크레센도'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새로운 이름인 '브라운아이드 걸스'로의 작명은 우연히 지어지게 되었다. 당시 '브라운아이즈'를 히트 시키고 '브라운아이드소울'까지 히트시키며
승승장구하던 박종갑사장님과 자주 만남을 가졌는데 식사자리에서 우연히 내가 '브라운 아이드소울'이 있으니 '브라운아이드 걸스'도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이걸 내가 만들어 봤으면 하는데 이 이름을 제가 사용해도 될까요?" 


 


'브라운 아이드'라는 이름이 상표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박사장님은 흔쾌히 "일상씨가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냐?"며 힘을 주었다. 방송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음악성 위주의 화음이
아름답고 거기에 랩까지 겸비된 당시 국내에서는 없었던 구성의 팀을 완성하고자 하는 맘에 가슴이 들떴다.


 


그래, '브라운아이드 걸스!' 이
이름이야!


 


스윗한 목소리의 나르샤와 중저음과
중고음까지 안정된 발성을 보여주는 가인, 남자 랩퍼와 비교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고 오히려 그 이상의 실력을 보여주는 미료, 그리고 팀의 리더로서
인간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부분까지 선두에서 지휘할 줄 아는 제아까지...... 당장의 히트보다 초창기 팀명처럼 점점 실력을 성장
시켜가며 각자의 개성을 오래오래 발휘하는 팀이 되리라는 꿈의 시작이 코 앞에 있었다.


 


 


가와서


 


당시, 음악계에서 내 이름이 프론트에
서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했다. 필요 이상으로 대중적인 색깔로 바라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회사 전체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내가 할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작곡가의 위치 그 이상이 필요했다. (사실 이 이 부분 때문에 후에 여러가지 딜레마가 오게 된 건 사실이다. 실질적인 회사 내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기보다 뒤로 한 발 빠진 모습에 대내외적으로 혼란도 있었고, 스스로도 여러가지 복잡한 심경에 빠지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장단점을 따져 본 결과
회사 내에 다른 프로듀서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더 나아가서는 가수 한 팀 마다 각기 다른 프로듀서에게 책임을
분산시켰다. 그래서 브라운아이드걸스, Ez Life, 써니힐, iM과 OST불새 등의 앨범은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작곡 분야도 나는 앨범의 구성에서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는데 치중했고 젊은 차대세 작곡가를 키우기 위해 이민수라는 작곡가를 내세웠다. 민수는 초창기 회사 주주멤버 중의 하나인
박해운 작곡가의 문하생이었고 내가 작곡가로 키우던 최필강(PK라는 예명으로 현 YG소속 작곡가이다) 역시 성장시키기 위해 회사 내외 작품에 적극
참여시켰다. 특히 필강이는 초창기 연습생들의 연습을 도맡아 작업했었다. 그렇게 오랜 연습과 녹음 시간을 지나 세상에 '브라운아이드 걸스'라는
이름이 나왔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많은 사람들이 가창력과 랩실력을 겸비한 4인조 여성그룹에 주목했고 앞으로의 행보가 더 주목되는 신인 아티스트라는 칭찬을 많이
해 주었다.


 


그러다가 조피디와 내가 프로젝트로
준비하던 앨범 PDIS(피디스)의 수록곡 중 'Hold The Line'이라는 곡의 보컬에 브라운아이드 걸스를 투입했고, 그 해 이 곡으로 여러
상을 받기도 하며 많은 인기를 얻었다. 아이들은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는 것이 어떤 건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바쁜 스케줄을
이어갔다. 아이들이 상을 받고 감사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기뻐하던 그 때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었다. 그리고
여름에 발표한 ‘오아시스’까지 연달아 나온 업템포의 음악에 사람들은 더 환호했다. (이 ‘오아시스’라는 곡은 전국 학교폭력을 근절하는 음악으로
아직까지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하며 불려져 오고있다.)


 


모든 일에는 음과 양이 함께
존재한다.


다음 앨범이 들어가는 시점에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떤 음반이 만들어지길
원하니?"


 


음악적으로 이것저것 평소에 많은
이야기를 하던 아이들에게 의외의 답이 나왔다.


 


"잘 되는 음반이었으면
좋겠어요."


 


이 '잘 되는'것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아이들이 생각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든 알 수 있었다. 이제 내가 처음 브라운아이드걸스를 만들었을 때의 컨셉을 계속 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트렌디하고 강한 음악으로
가자."


 


일종의 모험이 필요했다. 음악적인
지식은 전무했고 음악계에 들어 온지도 얼마 되지 않은 친구였지만 사람과의 친화력, 그리고 비지니스적인 감각이 탁월했던 조영철이라는 친구에게
프로듀서를 맡겼다.(이 친구는 대표를 맡고 있는 최윤석의 고등학교 친구인데 내가 윤석이를 회사의 대표직을 맡기면서 자연스레 음악계에 들어온 친구
중에 하나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참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다. 현재 미스틱89의 부사장직을 맡으며 아이유, 가인의 솔로앨범 등을 히트시키며
최고의 프로듀서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말이다.)


 


반복되는 우연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철이가 프로듀서를 맡은 'L.O.V.E'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아브라카다브라’라는 곡은 브라운다이드걸스 존재감의 정점을 찍게 되었다. 소위
‘걸그룹’에 속하게 되며 브라운 아이드걸스의 방향성이 그야말로 변화하기 힘들만큼 깊이 새겨진 계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음반 작업을 시작하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데모곡을 받으며 ‘강한’음악 만들기에 힘썼다. 사실 나는 이 시기에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실질적인 업무에서는 한 걸음 물러 나 있었다.
새로운 신인들 트레이닝과 작품자들 이용촉진에 신경을 더 쓰고 있었는데 브아걸의 신곡 작업에만 들어가면 부담감이 커진 회사 스탭들의 스트레스가
그야말로 극에 달하는 것을 곁에서 볼 수 있었다.


 


'너무 세게 쥐면
부러질텐데...'

'센것에서 더 세게'를 보이지 않는 캐치 프레이즈로
작업하는 브아걸의 작업은 음악을 한다고 보기에는 너무 힘겨워 보였다.



‘아브라카다브라’의 성공은
브아걸에게 독이든 성배여던 걸까?...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