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악기의 왕, 피아노의 발명과 300년의 역사
DATE : 2014.05.21

글쓴이: 유지연 (News Korea)


오늘날 ‘악기의 왕’이라고 흔히 일 컬어지는 피아노도 불과 300년 전 발명되었을 당시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피아노의 발명과 발전의 역사를 안다면 시대에 따른 피아노곡을 이해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된다. 피아노곡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피아노 역사 속에 있다.

피아노는 그 최초의 이름, 즉 피아노포르테(pianoforte, 여리게도 세게도 연주할 수 있는 쳄발로)가 말해 주듯이 셈여림의 표현이 가 능하다는 점에서 같은 건반악기이면서도 쳄발로와는 다른 새로운 악기였다. 

1708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쳄발로 제작자 크리스 토포리가 쳄발로처럼 현을 뜯는 방식이 아니라 건반을 누르는 힘이 지렛대 작용으로 해머에 전달되어 해머의 속도에 의해 음량이 결정되는 구조 를 가진 악기인 피아노포르테를 발명한 것이 피아노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 이탈리아 대중들이 즐겼던 음악은 오페라와 더불어 쳄발로가 사용되는 기악곡이었고, 쳄발로가 그 자체로도 중요한 독주악기였기 때문에 피아노포르테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크 리스토포리는 1708년 발명한 피아노 이후로 1720년까지 여러 타입의 피아노를 제작하기도 했으나 사는 사람이 없어서 쳄발로 제작으로 돌아가 파산을 모면하려 했다고 한다. 

이 무렵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바흐는 피아노를 쳐본 적은 있으나 이 악기에 대해 별다른 관심 을 두지 않았고 따라서 자주 연주하지도 않았다. 

또한 바흐와 같은 해에 태어난 이탈리아의 작곡가 스칼라티는 건반악기를 위 한 수많은 소나타를 남겼는데 모두 쳄발로를 위해 쓰여진 것으로 피아노에는 그 역시 관심이 없었다. 이에 비해 헨델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도중 크리스토포리의 공장을 직접 찾아가 음의 강약을 표현할 수 있는 이 악기를 살펴보는 등 큰 흥미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결국 새로운 악기 피아 노포르테는 그때까지의 쳄발로가 가진 협소한 음량 변화의 한계를 뛰어넘는 우수한 악기였으나 막상 그 보급이 시작된 것은 발명에서 60년 이상 의 세월이 흐른 1770년 무렵이 되어서이다. 

오늘날 우리가 피아노를 통해 접하고 있는 바흐나 헨델, 스칼라티, 심지어 초기 모 짜르트의 작품들은 실제로 그 당시 피아노와는 다른 쳄발로를 위해 쓰여졌다는 점을 고려하여 연주시 특별한 해석을 요구하기도 한다.  

 

피아노의 보급과 발전 과정은 사회적 상황, 또 작곡가들의 요구와 많은 관련이 있다. 독일인 오르간 제 조업자의 제자인 프레데리치는 1785년, 조립이 훨씬 간단하고 장소도 별로 차지하지 않는 적당한 크기의 ‘스퀘어 피아노포르테’를 제작하였는데 이는 귀족 계급처럼 넓은 실내를 갖지 못한 중산 계급이라는 새로운 고객의 흥미를 끄는데 성공했다. 여기에는 피아노의 제조원가 가 상당히 저렴해진 것도 한몫 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음악 애호가들이 기존가구의 스타일에 악기의 디자인을 맞추던 유행을 따라 19세기 말까지 갖가지 가구를 방불케 하는 옷장형, 테이블형, 책장형, 피라미드형 등의 피아노가 등장했다. 

여전히 클라브상(쳄발로) 에 집착하고 있던 프랑스에서도 1789년 프랑스 혁명의 파장으로 하층 계급의 시민들이 귀족 계급이 소유하고 있던 클라브상을 파괴해 버리거나 불질러 버렸고 이들은 또한 피아노라는 새로운 악기에 열광했다. 점차 악기가 보급되면서 악보 출판업자는 작품의 타이틀 페이지 위에 ‘ 쳄발로 또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하여’라고 명시하여 악보 판매를 늘이려 하기도 하였고 이는 다시 피아노의 보급을 촉진하였다.

 

한편, 1777년 오스트리아 빈을 들른 21세의 모짜르트는 이제 쳄발로는 버리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로 빈의 안드 레아스 슈타인이 제작한 피아노포르테에 매료되었다. 그리하여1777년 이후에 쓰여진 그의 모든 건반음악은 피아노를 위해 쓰여졌으며 이전의 작 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강약의 표시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 모짜르트가 반한 슈타인의 피아노는 놀라울 정도로 소형이었고 가벼운 액션과 작은 소리를 가졌으며 61개의 건반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의 피아노는 88개의 건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짜르트의 모든 피아노 작품이 바로 이 음역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 있다.

 

19세기로의 전환기에 콘서트가 귀족의 살롱에서, 중산계급 을 널리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콘서트홀로 옮겨감에 따라 보다 큰 음량의 피아노가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피아노 제작자들이 특허를 얻고 산업 전시회때 주어지는 메달이나 상장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피아노포르테라는 용어가 차츰 사라지고 간단히 ‘ 피아노’라는 표현이 이를 대신하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피아노가 발전하고 널리 사용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작곡가들의 역할 또 한 컸다. 

베에토벤은 악기의 능력을 넘어서는 다이내믹한 음악표현을 늘 추구했고, 1817년 이후로 접어들어서는 특별히 음량이 큰 악기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악화된 청력 때문이라 짐작된다. 쇼팽은 피아노라는 악기를 통해 화려한 기교와 더불 어 섬세한 감정표현을 이끌어내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리스트는 자기를 표현하고 스스로의 모습을 보이길 원했던 외향적인 낭만파 피아니스 트로서 청중들에게 연주하는 자신의 손과 옆모습이 보이도록 무대위에 피아노를 배치시키고, 암보연주와 초인적인 기교로  청중을 매료시 키는 연주를 통해 오늘날 콘서트홀에서의 피아노 리사이틀을 정립한 셈이다.